Brahma Sputa Siddhanta
by 멜랑꼴리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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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인물열전-< 열혈남아 >김원봉
약산, "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라" 라며 독립운동가인 고모부 황상규가 지어준 김원봉의 아호입니다. 1898년생인 약산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에 온 것은 그의 나이 22살 1919년 6월경 입니다. 앞에 윤세주 편에서 언급하였지만 이 곳에서 약산은 폭약 기술을 배우고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창단합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 자기와 뜻이 맞는 동지를 얻어 의열단을 창립하고 떠난 것에 대해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더라면 의열단의 열매는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중의 한 분인 이시영과 이러한 인연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생도대장이던 성주식은 나중에 약산의 평생의 동지가 됩니다.

약산이 서간도를 떠나 상해에 온 것은 1920년이며 1년 뒤에 김산도 이 곳으로 와서 만납니다. 상해에서의 의열단 활동은 창단 직후부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대대적인 암살과 폭탄투척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이러한 의열단 폭력 활동을 비난하자 약산은 이회영 등 반이승만의 북경그룹과 가깝게 지내며 의열단이 무조건 폭력을 일삼는 테러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인 것을 천명하기 위해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혁명선언의 기초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나온 것이 1923년 1월에 발표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입니다.

이 시기 약산의 생활과 모습은 < 아리랑 > 김산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려다녔지만 약산은 언제나 조용하였고 육체운동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약산은 대단히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져 그를 좋아했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 20대 초반 고전적인 테러리스트의 모습입니다만 30대 이후 약산이 대중자도자로 나서면서는 변화를 보입니다.

1925년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과 민족해방의 진원지인 광동에 혁명가들이 몰려오고 의열단원과 약산도 중국 국민정부의 북벌과 혁명운동에 동참합니다. 혁명열기에 동참한 약산은 광주에 세워진 국민당 정부의 황포군사학교에 1926년 1월 4기생으로 입학, 스스로 군사전문가로 배우며 마침내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합니다. 장작림 등 봉천군벌을 물리치면 중국이 통일될 것이고 이러한 열기로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 믿고 약산과 많은 조선인이 참여하지만 1927년 4월 장개석의 반혁명으로 물거품이되고 맙니다.
약산이 20대 후반 중국의 삼민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국제주의 온갖 사상의 시험장인 혁명무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특히 중국 내의 국공합작은 이후 약산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보수 민족주의자들이 1920년대 무력감에 빠져 사분오열되어 무력증에 빠져 있을 때, 약산은 새로운 젊은 세대로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전면에 나섭니다.

이후 의열단의 노선은 북벌운동 참여의 교훈 속에서 국내의 노동대중운동에 관심을 기울여 약산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만들어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기도 하나 의열단 전체적으로는 민족주체 민중중심의 노선을 지향합니다. 의열단이 이 때부터는 민족유일당운동 결성에 노력하는 등 자신이 유일한 중심조직이 아니고 전체 혁명운동의 첫단계로서 의열단 성격을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특히 1932년 고향 밀양에서 망명한 윤세주를 12년만에 재회하고 그는 바로 약산을 곁에서 도와줍니다. 그리고 1931년 약산은 조선에서 망명한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과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고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합니다. 특히 박차정은 근우회사건과 부산방직파업 사건 등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의 부상 후유증으로 1944년 34세에 죽을 때까지 정치간부학교 여성교관, 조선의용대 여자의용군 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하는 등 아내이자 동지로 약산을 보필합니다.

이후 약산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만들어 1935년 9월까지 3년간 혁명인자를 길러내고 이후 이들은 항일운동의 주요 역할을 다합니다. 이렇게 의열단이 점차 무장항쟁의 조직을 길러나갈 때 1930년대 개인테러 활동은 오히려 무정부주의자나 임시정부 내의 김구의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고 이봉창, 윤봉길의 의열투쟁은 중국의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무장독립군의 양성은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쪽과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한인애국단의 책임자인 김구의 두 갈래로 추진됩니다.

1935년 7월 마침내 중국 관내 최초의 통일전선정당 민족혁명당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명칭 변경) 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약산은 단일당 운동을 주도하고 당 서기부장으로 일합니다. 윤세주는 이 때 이론적 지도자로서 강령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민족혁명당은 사실 의열단의 강령과 정신을 이어갑니다. 이때 민족혁명당의 최대 과제는 민족해방군을 어떻게 양성하느냐는 것으로서, 혁명군= 민족해방군 이라는 생각으로 마침내 민족전선 산하의 조선의용대를 1938년 9월 중국 한구에서 발족시키며 이 때 약산은 조선의용대 대장으로 취임합니다.

조선의용대는 대원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지식인들로서 수준높은 군대로 국민당 구역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공작, 지하공작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1940년 말 부터 화북으로 전선이 이동되고 직접 전투를 원하는 의용대원의 의사에 따라 1941년 초부터 조선의용대의 80%가 이동합니다.

여기에서 약산은 20% 남은 의용군(나중에 광복군 지대로 편입됨)과 남고 윤세주와 헤어지는 데 약산의 국민당 세력 내의 잔류와 임시정부의 참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약산이 어디에 남을 것이냐의 고민은, 부인 박차정의 부상 등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의 쓰라린 경험으로 전략상 윤세주와 역할 분담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 2차국공합작도 분열되고 다시 반공 극우의 광풍이 부는 1940년 초 그시점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국민당의 의심을 피하면서 동시에 임시정부의 극우화 견제 등 당 역량 보존을 위해 남았다는 것이 설득력있어 보입니다. 해방구 하나 없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불가피하게 중국 내부의 혁명 속도나 국공합작의 결합과 분열, 그리고 나날이 변하는 세계정세와 일본의 침략 정도에 따라 규정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 내에서 벌어졌던 여러 형태의 민족해방운동도 다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임시정부 내에 들어간 약산은 군무부장으로 참여하여 임정의 분위기를 바꿔놉니다. 임정이 중경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연로하여 문패나 부지하려는 사람들의 집합처 " 근본적으로 혁명적 단체라 볼 수 없고 오히려 한인들의 동향회 " 라는 야유를 받았을 정도로 심지어는 양반과 상놈을 따지는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40대 약산과 그 세력의 젊은 피 수혈은 임정을 활기있게 만들고 군무부장으로서 광복군을 지휘하나 임시정부 내에서의 군사적 역할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으며, 연합국 승전에 대비 망명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 맺기도 전에 해방을 맞이합니다.

임시정부는 개인자격이라는 미군정의 각서를 받고 11월 중국을 출발합니다. 중경을 거쳐 경유지인 상해에서 미국이 보내주는 비행기를 18일이나 기다리다 15명 정원인 수송기에 먼저 타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이 1차 귀국 비행기에는 한독당 주류가 타고 옵니다. 임정 = 김구 = 한독당의 등식이 조선의 민중에게 각인되고 약산은 2차로 12월 2일 보내준 비행기에 뒤늦게 타고 일기 사정으로 전남 옥구 비행장으로 내립니다. 약산이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의 첫 발에 목격한 것은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의 참상이었고 약산은 이에 충격을 받습니다.

후세 사가들은 약산의 1차환국의 양보가 실질적인 임정의 2인자로서 그동안 싸워 온 투쟁의 성과가 상실된 것에 대해 우려하지만, 1946년 2월 고향 밀양에서의 환영은 극치를 이룹니다. 20만 군중의 밀양군민이 모인 환영대회를 절정으로 경남지역과 부산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사망한 부인 박차정의 '핏덩이가 말라붙은 속적삼' 을 친정에게 돌려주기도 하며 48세 약산은 대중적인 지도자로 나섭니다.

그러나 분단논리가 지배하는 이승만세력과 미국의 의도에 약산의 민중통일정부의 꿈은 좌절되고 1948년 김구와 오른 남북협상이 좌절되자 북한에 머무릅니다. 일제의 끈질긴 추적과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지 않았던 약산이 1947년 4월 친일파 경찰 노덕술 수갑에 의해 장택상에게 끌려와 철창에 갇히자 수모를 당한 약산은 3일 낮과 밤을 울었다고 합니다. 의열단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임정의 2인자, 조선민전의장 약산을 남한정부는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북한에서의 검열상 등을 지내다 1958년 말 실각 후 아직도 그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다만 최근 밝혀진 혁명열사능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북한정치공간에서 사라진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혹여 상상력을 부여하여 그의 죽음의 자살이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약산의 정신 속에 스며 있던 의열단 활동, 북벌 국민혁명,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좌우합작, 통일운동, 한국전쟁 등에서 무수히 숨져간 그의 동지들의 혼과 같이 가려했었을 것입니다.

글: 주동욱
by 멜랑꼴리아11 | 2005/08/18 16:05 | history log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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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t 2008/09/05 00:39
흠.. 잘 봤습니다. 아직까지 김원봉을 받아들이긴 우리사회가 좀 이르더군요...

하다못해 돌베개(장준하)라는 책을 읽어봐도 그렇고...

한번 님께 박헌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부탁해도 될까요? ^^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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